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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는 강화도 남부 정족산성 안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입니다. 원래는 경기도 사찰이었으나 1995년에 강화도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뒤로는 인천소속 사찰이 되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강화도에 창건된 전등사,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사찰명 변경, 조선왕실과 호국도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강화도에 창건된 전등사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힙니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자리에 석상을 쌓아 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유명합니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의 도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라고 합니다.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1259년이었습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었는데,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진 바 있습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지는데 이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정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습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 1282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대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과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되었습니다. 

     

    조선 왕실과 전등사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입니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고,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도 이때 중건되었습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습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에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습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습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화흠은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습니다. 이때 왕실의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습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최고의 승직의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습니다.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였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고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습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습니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조선에서 물러갔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 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대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습니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내에 세웠습니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남게 된 것입니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고량포를 건설하였꼬,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또한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힙니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는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시대에는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님들은 이것마저 수행의 과정으로 여겼고, 사찰은 국난이 다쳐왔을 때는 나라를 구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불교는 역사의 발전과 함께 번영하기도,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항상 우리의 삶과 함께했습니다. 지금도 불교는 일반인들에게 템플스테이라는 장을 통해 활짝 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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