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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의 변천사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입니다. 의신조사가 불법을 구하러 천축에 갔다가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나귀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합니다. 의신조사가 나귀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후 법주사는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불교국가였던 신라부터 조선 중기까지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듭하며 거대한 사찰로 자리 잡았으나 임진왜란은 수십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사찰을 전소에 가깝게 망가뜨렸고 인조가 즉위하고 난 후에야 벽암대사의 중창으로 가람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2009년 12월에는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팔상전 - 우리나라 유일의 전통목탑
우리나라 수많은 탑 가운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목탑은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입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 중 유일하게 근대 이전에 지어진 5층 목탑입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것을 선조 38년부터 인조 4년에 걸쳐 벽암대사가 주관하여 다시 세웠습니다. '팔상전'이라는 이름 때문에 8층 목탑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5층이고, 벽면에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에서 중요한 8가지를 그린 팔상도가 있어서 '팔상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팔상전은 두 단의 석조 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기단 네 면의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이 기단과 계단은 통일 신라 때의 것입니다. 각 층의 밑면은 정사각형이며, 1층과 2층은 다섯 칸, 3층과 4층은 세 칸, 5층은 두 칸으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들어 안정감을 줍니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는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식이고 5층은 다포식입니다. 지붕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네 개의 지붕면이 뻗어 있는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 꼭대기 부분은 조선 시대의 것으로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팔상전 내부 한가운데에는 5층 전체를 통과하는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의 네 면에는 팔상도가 두 폭씩 있고 그 앞에는 열반상과 삼존 불상이 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으로 건축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됩니다. 목탑의 전성기였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이후의 목탑이라 그런지 전형적인 고대식 목탑과는 달리 외형이나 구조가 상당히 특이한 편입니다. 거대한 중심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한 연속구조인데, 내부는 통층이므로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는 없고 높이는 22.7m, 평면은 5칸으로 정방형입니다.
청동미륵대불 - 현대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거대불상
신라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는 7년간의 노력 끝에 법주사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습니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1872)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 비용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습니다. 일제치하인 192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80%의 공정상태에서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 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습니다. 1986년 류월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6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습니다. 기존조성 시멘트 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입니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 일월드컵 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습니다.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입니다. 개금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2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 900㎡에 황금 3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 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총 4,500여 명이었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 있는 금동미륵대불입니다. 최근에 조성한 불상이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김복진이 참여해서 조성한 의미 있는 작품으로 현대 불교조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주사는 불교의 유토피아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미륵신앙의 중심사찰로 많은 이들에게 미륵신앙을 전하기 위해 미륵대불을 조성했습니다. 중생들의 욕심이 하늘에 닿을 만큼 가득 차서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그때 미륵불이 출현하여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어찌 미륵불이 미래에만 나타날 부처가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힘들고 괴로울 때 손을 내미는 희망이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미륵이 살아 숨 쉴 때 인생의 행보가 보다 안전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정이품송 - 벼슬받은 소나무
지금은 터널이 뚫려 말티재를 넘지 않아도 속리산 법주사에 도착할 수 있지만 구불거리는 산길의 묘미를 느끼려면 말티재를 선택하는 편이 낫습니다. 말티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를 찾아가는 길에 닦은 길인데 이후 조선 세조가 법주사를 찾아갈 때 길에 얇은 돌을 깔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말티재를 넘어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1464년 세조가 말티재를 넘어 법주사로 가는 길에 가지가 늘어진 소나무 때문에 가마가 지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소나무 가지에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자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올려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가다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후부터 정이품송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소나무의 외형이 삿갓을 편 모양을 닮았으며 높이는 약 15m이고 둘레가 약 4.7m, 줄기는 동서로 19.9m, 남북으로 19m 뻗어있습니다. 정이품송은 수령이 약 800여 년이며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